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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이 떨어지는 속도 (04)

꽃잎이 떨어지는 속도 (04)

꽃잎이 떨어지는 속도 (04)

일상을 아주 느리게 본다면, 뒤돌아본 풍경은 당신의 기억과 다를 수 있습니다. 일상을 아주 느리게 실천한다면, 대면한 풍경은 당신의 어제와 다를 수 있습니다. 꽃잎이 떨어지는 속도. 이번 호에는 효율적 삶이 지배적인 우리 시대에 느림의 또 다른 가치를 읽어내는 홍성욱 교수의 목소리를 들어 보겠습니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글 홍성욱 교수

느린 과학

하루가 멀다 하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느리다는 것은 미덕과 거리가 멀다. 우리 사회는 생각이 느리고, 말이 느리고, 행동이 느린 사람을 칭찬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느린 생각과 행동은 심신이 어눌하거나 나이가 들었음을 의미한다. 느린 삶을 경험하는 ‘슬로우 시티’는 빠른 삶에 지친 사림들이 잠깐 쉬면서 다시 빠르게 질주할 활력을 얻는 곳이지, 느림으로 안착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미학자 발터 벤야민은 19세기 말엽의 파리에서 쇼핑을 하러 다니던 사람들이 줄에 매단 느림보 거북이를 데리고 다녔다고 하면서, 현대 세상에서 이런 느림의 미학이 사라졌음을 개탄했다.

삶은 같은 속도로 늙어가기 때문에 주변의 것들이 빨라지면 삶에는 여유가 생겨야 한다. 1시간 걸리는 계산을 컴퓨터를 사용해서 10분에 한다면 50분의 여유가 생겨야 하며, 시속 100km로 달리던 기차가 300km로 달리게 되면 부산 출장에서 시간이 남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예전 같으면 다섯 시간 동안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서 일을 본 뒤에, 자갈치 시장에서 싱싱한 생선회에 소주 한 잔 곁들여서 저녁을 먹고, 동래 온천에서 목욕한 뒤에, 온천장 여관에서 하루 밤 자고, 다음날 서울로 돌아왔다. 그런데 부산까지 2시간이면 갈 수 있는 지금은 오전에 내려가서 오후 내내 일을 보고 저녁에 당일로 올라와야 한다. 전국이 하루권이라지만 그래도 집에 들어가면 밤 11시다. 회사는 숙박비를 아끼고, 직원은 외박 대신에 집에서 잠을 자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일까?

가장 빨리 변하는 것 중 하나가 과학이다. 1970년에 유전자재조합법이 개발된 뒤에 과학자들은 유전자를 임의로 자르는 방식이 아니라 타겟을 정해서 자르는 기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아프리카 발톱 개구리에 대해서 연구하던 과학자가 찾아낸 징크핑거(Zinc Finger)라는 손가락 모양의 단백질에서 찾아졌다. 이 단백질에 효소를 결합해서 만들어 낸 것이 ‘징크핑거 뉴클레아제’라는 1세대 유전자 가위였다. 그렇지만 이 기술은 사용하기에 어렵고 돈이 많이 들어서 그 응용이 제한적이었다. 이후 천천히 발전하던 유전자 가위 기술은 2010년에 제2세대 탈렌(TALENs), 그리고 2012년에 제3세대 크리스퍼-캐스9(CRISPR-Cas9) 기술이 나오면서 급성장했다. 특히 크리스퍼 기술은 과거의 유전자 가위와 달리 매우 쉽고, 싸고, 빠르게 원하는 유전자를 잘라 낼 수 있었고, 인간 유전자에도 응용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크리스퍼 기술이 발전하면서 대학원생도 쉽게 유전자를 자를 수 있게 되었고, 유전자를 자르는 데 드는 비용은 1000만 원에서 3천 원으로 떨어졌다. 과학자들은 자기가 찾아낸 유전자 가위를 애드진(Addgene)이라는 회사에 기탁하고, 여기에서 다른 유전자 가위를 싼 값에 구매할 수 있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수 백 개의 실험실이 유전자 가위 기술을 정교하게 발전시키고 이를 응용하는 열띤 경쟁에 참여하고 있다.

하나의 실험실에 시선을 고정하면 과학은 천천히 발전한다. 가설과 모델을 세우고, 실험을 하고, 실험 결과와 모델을 수정하고, 논문을 만들어서 투고하는 데 1-2년의 시간이 걸린다. 논문이 심사 과정을 거쳐서 출판되는 데에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 실험실에서 10개 이상의 팀이 경쟁적으로 비슷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논문 출판에 속도가 붙는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전 세계를 통틀어 수백 개의 실험실이 레이스를 벌이고 있다면, 과학의 발전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속화된다. 2012년에 크리스퍼 기술이 발명되고 2015년까지 4년 동안에 이에 대한 논문이 1,200편이 출판되었다. 이것만 해도 적지 않은데, 2018년에는 한 해 동안 미국 과학자들이 898편, 중국 과학자들이 824편, 일본, 독일, 영국, 캐나다 과학자들이 637편의 논문을 출판했다. 지금은 이보다 더 많을 것이다.

유전자 가위 기술은 새로운 곡식이나 가축을 만들어 내는 데에 응용될 수 있다. 유전자를 변형시켜서 말라리아 질병을 옮기지 않는 모기를 만드는 연구도 뜨거운 관심을 받으면서 진행 중이다. 그 외에도 현재 유전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치료제 개발도 기대해 볼 수 있다. 가장 논쟁적인 연구는 유전병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불활성 상태로 만듦으로써 유전병을 대물림하지 않는 데에 유전자 가위를 사용하는 것이다. 중국 과학자 허젠구이는 2018년에 이 기술을 이용해서 AIDS에 면역이 있는 유전자를 가진 3명의 아이를 출산시켰고, 러시아 과학자 데니스 레브리코프는 청각 장애 부부를 대상으로 청각 장애를 일으키는 유전자를 편집하는 실험을 했다. 연구자들은 이런 연구가 유전병으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유일한 희망을 제공할 것이라고 본다. 반면에 이런 연구는 결국 ‘맞춤 아기’(designer baby)를 만들어 낼 것이고, 과학이 오랜 진화를 통해 얻은 인간의 유전자 풀을 인위적으로 바꾼다면 이것이 인류의 미래에 파국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비판 역시 제기되고 있다.

방법이 없는 것일까? 벨기에 철학자 이사벨 스탕저는 응용과 상업화의 강한 압력 속에서 무서운 속도로 발전하는 ‘빠른(fast)과학’에 대한 대안으로 ‘느린(slow)과학’을 제창했다. 빠른 과학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 윤리적 성찰 없이,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구축해서 발전하는 과학이라면, 느린 과학은 과학자들의 충분한 토의와 검토를 거치고, 우려하는 시민사회와 소통하면서, 다양한 패러다임의 공존을 모색하는 다원주의적 과학철학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과학이다. 2015년, 유전자 가위를 처음으로 개발한 과학자 제니퍼 다우드너는 의료 목적의 유전자 편집은 무책임하다고 하면서, 유전자 가위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 전까지 ‘전 세계적인 모라토리엄(연구 중지)’을 시행하자고 촉구했다. 이런 모라토리엄은 ‘느린 과학’이 구현되는 하나의 제도적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느린 과학’은 과학자들의 양심에 맡겨둘 사안은 아닌 것 같다. 2018년의 논문 숫자를 보면 알겠지만, 2015년의 모라토리움은 물론 실시되지 않았다. 2018년에 유전자 가위를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인간을 대상으로 한 유전자 편집이 가까운 미래에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하면서, 이런 실험으로 접어드는 경로를 정의해야 할 시기라고 선언했다.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 같은 조건은 이 선언에서 빠졌다. 당시의 상황을 걱정한 세계보건기구(WHO)는 2019년 3월에 인간배아 유전자 편집 연구를 일시적으로 중단할 것을 권고하고, 같은 시기에 과학자들은 인간배아 유전자 편집 및 착상 연구를 전면 중단하는 모라토리엄을 실시하고 이를 감시할 국제기구를 창설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데 이 제안에 서명한 과학자는 7개국의 18명에 불과했으며, 무엇보다 지속적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2015년에 이런 제안을 했던 제니퍼 다우드너가 여기에 불참했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응용 가능성이 목전에 다가오면서, 인류 전체의 진화를 인위적으로 결정할 수도 있는 ‘맞춤 아기’ 같은 중요한 사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인다.

‘느린 과학’을 구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적 책임을 느끼는 과학자들의 적극적 실천은 물론, 이들과 시민, 사회과학자, 예술가, 종교인, 정치인이 연대하는 네트워크를 작동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유전자 가위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는 문제는 단지 과학이나 의학의 영역에 국한되는 문제가 이니라, 우리 사회 전체, 아니 인류 전체의 문제이다. 유전자 가위에 대한 대안적 과학으로 ‘느린 과학’을 상상하고 실천해 보는 것은, 기술이 발전하는 방식대로 우리가 맞춰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유도하고 통제할 수 있는가의 갈림길에서 선택을 하는 실존적인 문제인 것이다. 비록 느림을 추구하지만, ‘느린 과학’은 확고한(fast) 대안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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