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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읽기(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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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노성철 교수(사이타마 대학교, 일본)
변화를 향해 내딛는 작은 한걸음: 플랫폼 스타트업
국책연구기관이나 노동조합에서 발주하는 연구용역 과제는 새로운 산업과 조직을 배울 수 있고 업계 종사자들과 연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선사하기 때문에 매년 참가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즐거운 현장조사를 마치고 보고서를 쓰다 보면 어김없이 무력감이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정책적 대안을 쓸 때이다. 정부 관계자, 업계 전문가, 고용주 그리고 현장의 노동자들 모두 구조적 문제를 인지하고 그것을 해소해야 한다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변화가 가져올 불확실성과 서로에 대한 불신이라는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하다 보니 보고서의 정책대안이 두루뭉술하게 흘러갔다.
여기서는 이러한 답답함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을 보여준 한국, 미국, 일본의 세 스타트업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들은 기술적 자본의 실현을 통한 폭발적인 성장보다는 ‘변화를 위한 작은 실험’을 추구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1. 학습지 교사, 골프장 캐디, 방송작가, 대리기사, 배달 라이더 등의 특수고용 노동자들은 노동자로서 법적 지위를 인정받지 못해 사회적 안전망 바깥에 있는 대표적인 불안정 노동자들이다. 코로나19의 직격탄을 가장 먼저 맞은 집단도 특고노동자들이었다. 근로자성 문제는 사용자의 책임과 직결되기 때문에 노사정 합의를 통한 제도 변화는 지지부진했다. 한편, “자비스”라는 스타트업은 소규모 기업이나 자영업자들이 쉽고 체계적으로 세무관리를 할 수 있도록 세무사를 포함한 플랫폼 서비스를 운영 중이었다. 서비스가 알려지면서 자영업자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근로소득자도 아닌 가입자의 수가 꾸준히 증가했고, 창업자는 노동 연구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고 나서야 이들이 특고노동자임을 알 수 있었다.
곧 근로소득자가 연말정산을 하는 것처럼 특고노동자들이 종합소득세를 쉽게 환급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삼쩜삼’이라는 서비스를 기획해낸다. 노동 연구자들과의 계속된 협업은 이 과정의 핵심이었다. 연구자들은 220만 명에 달하는 서비스의 잠재적 고객 집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들이고 어떻게 일을 하는지, 창업자는 플랫폼을 통해 이들의 비공식 노동을 어떻게 공식화할 수 있는지 경험과 지식을 주고받았다. 이 서비스가 더욱 성장해 특고노동자들의 고단한 일상에 조그만 도움이라도 줄 수 있기를 바란다. 아울러,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는 두 집단–창업가와 활동가–이 더 많은 서비스와 플랫폼을 통해서 화학결합할 수 있기를 바란다.
#2. “매뉴얼의 나라”. 한국분들이 일본하면 떠올리는 이미지 중 하나다. 5년 전에 일본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절차와 과정을 중시하는 일처리 방식을 흡수해 내 덤벙거리는 성격을 고쳐야겠다는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결국 사단은 터졌다. 마음이 잘 통하는 한국의 선생님과 술을 마시다가 한국의 신진 연구자들을 일본에 초대해 이 곳 연구자들과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취지가 좋은데 으쌰 으쌰 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라는 안일한 생각은 결국 실무 지원을 맡은 학교 교직원과의 말다툼까지 이어졌다. 곧이어, 한일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일본 생활에 대한 회의감으로까지 이어졌다.
최근, ‘레이더 랩’이라는 스타트업을 설립한 창업자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성추행 피해자들이 어떤 지역에서 치한을 만났고, 어떤 피해를 당했는지 공유할 수 있는 커뮤니티 서비스인 “레이더 제트” 서비스를 작년에 출시해 일본의 주요언론에도 소개된 화제의 스타트업이다. IT 기술을 활용해 사회적 약자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사회 변화를 끌어내고 싶다는 창업자의 목표에 절로 박수가 나왔다. 하지만 더 큰 울림은 그녀의 조직운영방식을 들으면서 터져 나왔다. 처음에는 한국인과 일본인만큼 협업의 시너지가 나오는 조합이 없다고 하는 말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레이더 랩은 새로운 서비스를 구상하고 기획하는 것은 한국인 구성원들이 주도를 하고, 거기서 나온 산출물을 구현하고, 테스트하고, 배포하는 작업은 일본인 구성원들이 주도하는 방향으로 협업하고 있었다. 창업자의 빼어난 리더십과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공통의 인식 속에서 이러한 협업은 양측의 강점을 확인하는 집단적 경험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요컨대, 스타트업 자체가 문화적 차이를 효과적 협업을 위한 자원으로 전환하는 플랫폼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비단 한일관계뿐일까? 문화적 배경과 정치적 성향이 다른 이들이 같은 목표를 바라보며 함께 할 공간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레이더 랩’같은 스타트업이 보석 같은 이유다.
#3.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한국인 개발자들은 결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 크게는 미국에서 컴퓨터 공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실리콘밸리의 테크기업에서 경력을 시작한 집단과, 한국의 대기업에서 경력을 시작한 후 현지 지사를 거쳐 이직에 성공한 집단으로 나눌 수 있었다. 후자에 속한 이들의 경력이 이주와 함께 한 단계 도약을 한 반면, 한국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던 그들의 배우자들은 육아, 언어와 문화의 장벽, 네트워크의 부재 속에서 노동시장에서 점점 멀어진다. 비영리단체 “심플 스텝스”가 해결하려는 문제다.
이를 위해, 실리콘밸리에서 첫 경력이 필요한 이주여성들과 구인난을 겪는 한국 스타트업의 연결을 모색한다. 그리고 고군분투 끝에 현지에서 다시 경력을 이어가는 데 성공했고, 그 과정에서 심플스텝스의 미션에 누구보다 공감하게 된 이들이 멘토로 가세한다. 심플 스텝스의 대표는 이 과정을 ‘공감 네트워크의 확산’이라고 칭했다. 플랫폼을 통해 이주여성들은 공허함과 좌절감이 자신만의 경험이 아님을 알게 되고, 매일 반복되는 사회적 관계망 밖으로 한 발 내딛게 된다. 공감 네트워크는 그들의 배우자를 배제하지 않는다. 심플 스텝스는 부부가 함께 참여하는 세미나를 통해 어느 한쪽이라도 희생한다는 생각을 품게 되는 관계는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공감대를 넓히고 있다. 심플 스텝스의 활동은 플랫폼이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을 위해 함께 한 발 내딛을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 주었다.
혹자는 이러한 플랫폼들의 활동을 제도 변화라는 궁극적 해결책이 나올 때까지만 유효한 임시방편으로 볼 수도 있으리라. 나는 이들이 제도 변화를 주조할 주체들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Q (기업가센터) 교수님의 분석은 플랫폼 비즈니스의 또 다른 측면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플랫폼 비즈니스를 운용하는 집단 혹은 조직의 내부 과정도 중요할 듯합니다. 의사결정 방식, 지배구조 등등의 이슈를 현장에서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지요?
A (노성철) 먼저 자비스앤빌런즈는 현재 시리즈B 투자를 준비하고 있는 스타트업입니다. 기존의 중소사업자를 대상으로 했던 경리업무 자동화 서비스의 성장 속도가 둔화되면서 구성원들의 조직몰입도가 떨어지고 이직이 증가하는 시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2019년 말부터 구성원들이 함께 ‘삼쩜삼’ 서비스를 기획하면서 서비스의 사회적 가치를 발견하고 실현해가는 경험을 공유한 한 결과, 조직의 응집력과 내부의 의사소통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레이더랩은 외부 투자를 받지 않는 스타트업입니다. 투자를 받으면 자신을 포함해 조직 구성원이 원하는 대로 조직을 운영할 수 없다는 대표님의 철학이 뚜렷했습니다. 코로나19 유행 전부터 적극적으로 유연근무제를 실시했고, 안정성을 지향하는 일본 개발자들과는 근로계약을, 자유로움을 중시하는 한국 개발자들과는 프리랜서 계약을 맺는 것과 같이 구성원들이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조직과 관계를 맺고 일을 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끝으로 심플 스텝스는 비영리단체입니다. 대표와 두 명의 상근 스태프가 있고 멘토들이 재능기부 형태로 결합하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 테크 기업들 사이에 리턴십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궁극적으로는 그들과의 협업을 통해 더 많은 이주여성들이 노동시장 재진입의 첫걸음을 내딛을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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