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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sight/교수칼럼

안중호 명예교수의 회고 제1화

안중호 명예교수의 회고 제1화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우리는 좋아하든 싫어하든 많은 것이 바뀌어 가고 있는 혼돈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 바뀜이 마냥 순행(順行)만 하는 게 아니라 바라보는 관점, 처해있는 입장 및 시점(時點), 평가에 들이대는 기준에 따라 역행(逆行) 내지는 퇴행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지나온 많은 나날들 그야말로 비이성(非理性)의 시대를 경험한 것 같다.

필자는 경영대학 SNUBiz Newsletter 발행인으로부터 원고를 부탁받았다. 이론지향적, 전문분야에 관한 학술적인 글이 아니라 우리 대학 및 관련되는 역사의 편린들을 모아 활동 시대를 달리하는 경영대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도 누군가는 하여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시작한다. 나이가 좀 들어서는 과거 이야기는 꺼내지 말고, 미래를 논하라고 충고 받아왔고, 그것을 좌우명으로 남은 인생 살고자 다짐해왔지만, 용서를 바라며… 여기에 언급되는 것은 지극히 단편적이고, 편향된 필자의 굴절된 관점의 산물이라는 점, 거듭 독자들의 너그러운 아량을 바랍니다.

필자는 1988년부터 2016년까지 경영대학에 근무하면서 경험하였던 일 중 몇 가지 회상해보기로 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나머지 일부도 풀어내고 싶다. 그동안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메모나, 관련 자료들은 은퇴와 더불어 폐기처분 하였기에 참고자료나 기록물 없이 온전히 나의 머리에 남아 있는 기억에만 의존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88 서울 올림픽과 더불어 경영대학에도 PC 실습실이 갖추어지다

부임할 당시 경영대 교수님은 6개 전공에 필자 포함해 모두 23명, 지금은 60여 명(7개 전공). 그 마지막 추가된 전공이 경영정보(IS: Information Systems)이다. 필자는 생산관리 전공에 채용되었다가 만고(萬苦) 끝에 제7의 전공으로 분리 독립을 하였다. 경영대의 지금 학생 규모는 그때와 비교하면, 유감스럽게도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이 줄어들었다. 학생 숫자가 줄었다고 위축된 것은 아니라고 믿지만. 부전공, 연계 전공, 복합전공, 기타 타과 수강생을 포함하면, 항상 강의실이 북적거린다. 한 때, 대학에다 이런 부류의 학생들을 요새 유행하는 단어를 써, 포용적 가족으로 보듬자고 제안한 적도 있었다. 우리의 외연(外延)을 넓힐 기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SK경영관(58동), LG경영관(59동), 매니지먼트센터(59-1)가 순차적으로 건립되어 Complex를 이루고 있지만, 당시에는 9동(지금 사범대학)에서 행정대학원과 아래위층으로 연구실, 강의실들로 공유하고 있었다. 위의 건물 명칭에서 보듯, 경영대학 건물들은 정부의 관급공사가 아니라 기업들의 기부로 지어졌다. 이는 기업집단들의 산학협동 의지와 우리 선·후배 교수님들의 많은 노력이 들어간 합작품이다.

당시 58동 건물 설계 단계에서 미국의 선진대학들을 벤치마킹하기 위하여 담당 교수님들이 미국을 방문할 즈음, 필자는 곧 경영대학에 합류하기로 되어 있으면서 미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터라, 선배 교수님 모시고 몇 대학들 탐방을 한 적이 있었다. 특히 새 건물에 입주하면, 경영대학 전산실을 어떤 형태로 구성해야 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Facility Layout 관련하여 필자의 주장은 글자 그대로 고속 전산처리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이공계열과 달리, 우리는 IT를 이용한 경영학 분야 강의 지원을 위한 서비스가 필요하기에 학생들이 액세스 하기 편하게 배치해야 함을 주장하였으나, 그분은 기업, 연구기관들의 전산실이 모두 지하실에 설치되어 있지 않으냐는 의견이었다. 이에 우리는 PC실습실이지, 전산 서비스를 제공함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득시켰다. 사실 전산실을 지하실에 두는 주요 이유는 항온, 항습 등의 편리성과, 보안 통제 등 관리 때문이다. 당시는 메인프레임 컴퓨터 시대로부터, 미니, PC 시대로의 전환기에 있었던 셈이다.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1988년 귀국 직전, 당시 근무하던 학교에서 교수들에게 원하면 학교가 일부 보조하고, Zenith Data Systems 에서 제조 보급하는 386PC-AT(당시로는 최고사양)를 USD 3,600에 공급하겠다고 하기에 구입해서 들여왔다. 뿐만 아니라, 귀국 꿈에 부풀어 교육기자재 중 컴퓨터에서 출력을 Overhead Projector(OHP)를 통해 스크린에 바로 뿌릴 수 있는 시스템을 USD 2,500에 사서 1988년 강의 때부터 강의실에서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 장비들은 물론 필자의 사재(私財)이다. 학교에서 구입해서 쓰게 해 주면 좋으련만, 이런 기대도 할 수 없었던 당시 교실 환경이었다.

초기에는 지금 같은 고속 인터넷이 없었고, 학생들에게 외부기관의 데이터뱅크에 있는 데이터를 활용하는 방법을 시연하기 위해서는 Dial-up modem을 갖추어야 했고, 무엇보다 PC 실습실에 외부와 연결할 수 있는 전화회선이 들어와야 했다. 대학에다 부탁했더니,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그냥 전화회선 3회선을 강의실에 넣어달라 했더니, 대학본부 시설과와 관재과와 얘기해 보라고 해서 갔더니 그분들도 이해할 수가 없단다. 교수가 강의실에서 강의하는데, 전화가 왜 필요하냐고…. 힘들게 설득했더니, 이젠 관악 전화국(당시 봉천 전화국)에서 서울대로 들어올 수 있는 여분의 회선이 없어 증설이 필요하니까 안 된다고 했다. 이에 필자가 광화문에 있는 한국전기통신공사(지금의 KT)를 찾아가 고위층에다 바로 사정을 얘기했더니, 펄쩍 뛴다. ETRI가 개발한 TDX 교환기 개발로 소위 통신 혁명을 한 지금, 전화회선을 오히려 팔아야 하는데 무슨 말이냐? 이 일은 그분이 그 자리에서 바로 해결해 주었다.

전화 얘기가 나왔으니, 여러분 중에 백색 전화, 청색 전화가 무엇인지 아는 분 계시나요? 이에 관해서는 따로 언급 않겠지만, 전화교환기술이 조금 발전하여 이젠 모든 연구실 전화가 상대방에 통화하려면 더 이상 대학본부의 교환대를 거치지 않고서도 대학 구내의 다른 상대방에게는 바로 걸 수 있으나(반자동), 학교 규칙에 의해 서울시내 까지는 발신자 부담 없이 무료로 직접 전화를 걸 수 있었으나, 경기도, 시외, 국제전화는 반드시 교환대(switchboard) 교환수 중계를 거쳐야만 했다. 문제는 교환수가 당시 기능직 국가공무원 신분인 까닭에 많이 봐주어 한 시간 연장 근무해서 공무원 일과 시간 후에도 연결해주긴 하였으나, 그 이후 야간에 외부에서 연구실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불철주야 연구하시는 지금의 후배 교수들은 이해가 안 되겠지만. 더 우스꽝스러운 얘기는 국제학술대회를 국내에서 개최하거나, 국외학술대회 관련 국제통화(전화, 팩스)를 하려면, 믿거나 말거나, 정식 공문으로 24시간 전에 대학 행정실 통해 학장 결재를 받아 통신실에 보내 승인을 받도록 되어있었다. 수원에 있던 농과대학에 전화하는데도 교환수가 왜 전화하느냐고 묻고 기록으로 남겨둬야 한단다. 그러고서도 대학의 국제화, 세계화를 부르짖고 있었다니, 참 이런 코미디가……전자동(全自動) 교환전화를 갖추어 주고 있으면서도.

이 문제는 어떻게 해결되었을까? 필자는 대학본부 연구처에 보직교수로 일한 적이 있었다. 총장주재 정례 간부회의 때 사무국장에게 문제를 제기하였다. 문교부 국장급(이사관, 또는 고참 부이사관)으로 서울대로 발령받아 2년 정도 근무하고 다시 문교부로 돌아가는 간부들이다. 앞서 언급한 전화 차단을 풀어주자고 제안하였지만, 사무국장의 불가하다는 반박을 들었다. 필자는 교수 개개인이 사적으로 사용한 국제전화/시외전화 요금은 개개인에게 청구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주장했었다. 당시는 물론 지금 같은 스마트폰이 보급되기 전이다. 사무국장의 반론인 즉, 당시도 서울대에 예산으로 배정된 일 년 치 수용비가 년 초로부터 2~3개월만 지나면 동나는데,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다. 게다가 계산이 복잡해서 그런 방식의 과금이 불가능하다고 하기에, 과금 문제는 소프트웨어 수정으로 해결 가능하다고 주장했더니, 총장이 나서서 필자 제안대로 바꾸자고 끝맺음을 하였다. “이젠 바꾸자”라고 주장했을 때 흔히 들었던 말이 규정과 절차를 중요시하는 공조직, 그리고 그 생리를 몰라서 그런다고 핀잔받기 일쑤였다. 다양하고도 생각을 바꾸는 창의적인 사고가 허용될 수 없는 풍토이다.

 

비용이 수반되지 않는 통제는 없다

‘세계 속의 서울대학’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면서, 당시 이런 일도 있었다. 교수가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려면, 그냥 전공분야 해외 학자들과의 교류를 위한 참가는 허락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전공분야의 새로운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도움 될 뿐 아니라 조성될 수 있는 네트워킹 기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노릇이다. 제자 후학들의 장래를 연결해주는 고리로도 기능하는데…. 어떻든, 반드시 발표자로서, 그것도 학술대회장으로부터 초청받아 경비를 제공받는다는 확약서를 출장 신청 서류와 같이 대학본부로 보내어 허가를 받아야 했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느 학술대회장이 서울대 교수에게 항공료, 체재비, 등록비 등의 경비를 부담해준다고 하는 초청 편지 써 줄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본인 돈으로 공무출장을 갈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러면 경비지원을 학교가 해주면 되지 않느냐 하니, 예산이 없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동안 어떻게 교수들이 학술대회 참관, 발표, 등을 위한 해외출장을 해왔을까? 각 단과대학에는 공인된 연구소들이 있다. 이런 연구소에서 연구소가 경비 부담한다는 확인서를 써 주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일이었다. 왜냐면, 실제 경비지출을 해주지 않기 때문에.. 교수들이 학술연구와 직접 관련 없는 일에 왜 신경 쓰이게 만들어야 하나? 대학본부 간부회의에서 필자가 과감하게 요구하였다. 더는 이러지 말자고, 언제까지 가짜서류로 출장 허가받게 만들 것인가? 교무처/연구처는 그 이후로 이 절차를 없애 버렸다. 이후 교무처/연구처 소속 문교부 과장들 및 그 휘하 공무원들이 그 일 때문에 징계받았다는 사람 있다고 들어 본 적 없다. 학술대회 참가를 위한 출장 문제만 해도 지금은 학기 중 7일 이내, 1년에 14일 이내를 이용할 수가 있다. 이마저도 그전에는 문교부에서 시비를 거는 게 왜 교수들이 학기 중에 국제학술대회에 참가하느냐, 방학 중에 개최하지 그러냐고… 하도 어이가 없어, 필자가 전화에다 싫은 소리 했다. 세계적으로 어느 분야에서 국제학술대회 개최 일자를 서울대학교 학사력에 맞추어 정해 주겠냐고.

 

출처: 게티이미지뱅크

 

필자의 소신은, 공조직일수록 더 심하지만, 조직을 운영하는 관점을 통제(Control) 위주로 보면, 지시 통제가 가장 효율적인 관리 기법이다. 그러나, 그 반대급부(Trade-off)는 비용(Cost) 문제이다. 통제를 제대로 하자고 마음먹으면 반드시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통제에 수반되는 비용이 통제를 통한 결과로 기대되는 수익 (Benefit)을 초과하면, 차라리 과감하게 통제를 하지 않거나, 소극적으로 하는 편이 더 이익이다. 규제와 통제를 강화하다 보면, 일이 많아지니 공무원을 더 충원하여 일자리 창출하는 것이 좋다면서 일하는 사람을 늘린다. 그 결과, 단순히 인건비가 더 부담된다는 문제점은 물론이고, 더 큰 문제점은 증원된 인력이 하는 일이 없거나 적으니, 자리를 보전하려면 쓸데없는 규정/규칙을 계속 만들어 내어 결과적으로 합목적적인 결과물 산출에 아무짝에도 소용없고 필요 없는, 하지 않아도 될,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하려고 한다. 지금의 입법기관 통법부(通法府) 국회에서 활발한 의정활동한답시고 쏟아내는 법들, 내용도 모르고 동료의원 여러 명 끌어들인 공동 입법 법안에 숟가락 얹어 통과시킨 법규들, 그로 인한 폐해 생각해 보시길. 또 다른 예로, 예전에 관공서에서 민원서류에 도장 찍을 때 도장이 칸을 조금 벗어나거나, 약간 삐뚤게 찍으면, 모든 서류 다시 해오라고 했었다.

 

‘정보화’라는 것은 일처리 효율성을 높이는 보조수단으로서의 ‘전산화’ 그 이상이다

몇 마디 더하고자 한다. 3차 산업혁명이라고 불리든 4차 산업혁명이 더 최신의 그것이라고 주장하든 1990-2000년대 산업의 키워드 중 하나가 “ICT 발전과 정보화 혁명”이었다. 공공부문이든 기업이든 모든 조직에서 업무를 좀 더 효율적으로 처리할 목적으로 ICT를 보조수단으로 도입, 활용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기술 발전에 발맞추어 선제적(pro-active) 계획을 세워서 도입, 활용한 게 아니다 보니, 조직 전체를 관통하는 통합된 정보의 흐름 체계를 잡지 못하고, 필요에 따라, 기능 부서별로 전산화(computerization, 정보화가 아니라)하는 의미가 축소된 정보화, 즉 정보의 섬(Information archipelago)이 되어버렸다. 당시 5대 국가기간전산망이라는 국가정보화계획의 일면을 예로 들어보자. 그중에서 행정전산망 사례를 보자. 국가의 모든 영역이 급속하게 성장, 발달되어감에 따라, ICT를 중심으로 하는 기술 진보를 제대로 활용하여 선진국가재건을 도모할 정부의 역할과 기능이 먼저 재정의, 재편성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일하는 방식은 손대지 않고 그냥 컴퓨터, 네트워크만 도입하여 수작업을 자동화하는데 불과한 사업을 벌였다. 많은 시민들이 이젠 동사무소에 가지 않아도 집에서, 사무실에서 관공서가 발급하는 많은 증명서들을 손쉽게 발급받을 수 있다고 편리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묻고 싶다. 그렇게 발급된 많은 증명서를 누가, 무엇에, 어떤 용도로 쓰고자 하는 것인가? 민원인이 관공서에 증명발급 신청해서, 그 발급된 증명서를 거의 대부분, 국가, 지자체, 공조직 등에 다시 제출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왜 시민이 중간에 수고를 해야 하나? 법, 규칙, 규정을 정비해서 민원인의 정보제공 동의 하에 필요로 하는 정보를 자기네들끼리 협조, 연결하면 안 될까? 조직에서 정보기술을 활용하여, 의사결정 계층구조상 모두에게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의사결정 내릴 수 있도록 도움 주자는 것이 시스템의 존재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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