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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옥석을 가리는 일
기업의 옥석을 가리는 일
1. S&P 한국대표를 맡게 되기까지 여러 여정을 거쳐오셨을 것 같습니다. 어떤 커리어를 걸어오셨나요?
처음 일했던 곳은 종합금융사였는데, 외자 유치가 절실했던 시절 외국 은행들과 한국 회사들이 50대 50으로 출자한 금융회사들이었습니다. 솔직히 종합금융회사가 정확히 뭐 하는 회사인지도 잘 모르고 단지 연봉을 많이 준다고 해서 들어갔는데, 몇 개월 다녀보니 금융업은 자본의 크기도 아주 중요한데 회사의 규모가 너무 작아 장기적으로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 퇴사했고, 이후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곳은 대우증권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금융 담당 애널리스트로 일하면서 IMF 위기와 대한민국 대형 시중은행들과 대우그룹의 몰락을 직접 목격했는데, 애널리스트로서 이런 사건들을 실제로 경험할 수 있었던 건 아주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가 제 지적 재산의 큰 부분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그러다가 1999년 닷컴 붐에 야후! 코리아로 이직해서 콘텐츠 팀장으로 잠깐 일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이후 신한투자증권으로 바뀌게 된, 당시 굿모닝 증권에 금융담당 애널리스트로 다시 복귀했습니다. 2001년 카드 사태와 현대그룹 위기 등 한국 금융 시장의 여러 위기를 애널리스트로 일하면서 아주 가까이에서 간접 경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금융담당 애널리스트를 할 때마다 우리나라가 금융위기를 겪게 돼서 친구들이 “마이너스의 손”이라고 놀리기도 했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많은 인사이트가 생긴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IMF 때 외국계 회사에 우리나라 회사가 많이 인수됐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외국계 신용평가사를 알게 됐고, 신용 평가회사가 증권회사의 주식 담당 애널리스트보다 훨씬 더 긴 호흡으로 분석을 할 수 있는 환경일 것 같아, 제 적성에 더 잘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4년에 지금의 S&P로 옮겼습니다. 특히 홍콩에서 일할 때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 글로벌 금융 위기를 거치며 또 한 번 국제금융시장에서 인사이트를 얻는 기회가 있었고, 2017년부터는 8년째 S&P의 한국 Rating 대표로서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습니다.
2. S&P 한국대표로서 일하시면서 가장 큰 책임감을 느끼시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한국 대표로서 가장 중요한 임무는 S&P Rating이 한국 시장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이끌어내는 것입니다. 단기적인 성과에 그치지 않고 장기적으로 회사가 안정적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전략과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를 위해 고객의 니즈를 잘 파악하고 고객으로부터 계속해서 신뢰를 받을 수 있도록 reputation 관리도 잘 해야 합니다. 또한, 언론과 정부와의 관계도 불가근불가원의 관계를 적절히 잘 유지해야 합니다. 직원들이 최고의 환경에서 눈치 안 보고 일할 수 있는 심적, 물적 환경을 제공하고. 좋은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책임입니다. 또한, 외국계 신용평가사를 다니는 한국인으로서, 국내외 투자가들이 한국 회사의 옥석을 가리는 데 객관적이고 믿을만한 신용평가 Benchmark를 제공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한국의 좋은 기업들이 국제금융시장에서 안정적으로 자본조달을 하는 것에 조금이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 뿌듯함을 느끼고 있기도 합니다.
결국 신용평가는 채무이행 가능성 측면에서 ‘기업의 옥석을 가리는 것’입니다. 부채상환능력이 높은 회사에는 높은 등급을 주고, 부채상환능력이 낮은 회사에는 낮은 등급을 주는 것이죠. 부채상환능력이 더 좋은 회사가 금융 시장에서 더 낮은 가격으로 자본을 조달하는 게 맞는 거잖아요? 만약 시장에서 부채상환능력이 높은 회사와 낮은 회사의 구분이 잘 안된다면, 투자자들이 불안해서 적극적으로 채권투자를 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믿을 만한 신용평가회사가 각 회사의 신용도에 맞는 적절한 신용등급을 제시해 준다면, 투자자들은 낮은 신용등급의 회사에는 높은 이자를 받고 높은 신용등급의 회사에는 낮은 금리를 요구하는 등, 신용도에 따라 적정금리산출이 용이해져서, 결국 더 많은 투자가가 회사채시장에 참여하게 되고 이에 따라 회사들의 자금조달이 수월해지는 효과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또 한 가지는, 국내기관들은 국내의 여러 이해관계 때문에 해야 할 말을 잘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럴 때 외국계 신용평가사 대표로서 시장에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을 하는 것도 저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3. 최근 글로벌 경제 불확실성 속에서 한국 경제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다고 보시나요? 이러한 상황에서 신용평가사 S&P의 역할은 무엇인가요?
한국 경제는 수출 주도형 모델이어서, 국제 교역 환경이 통상마찰이 적고 자유무역을 권장하는 환경이 되어야 유리합니다. 그런데, 최근 미·중 간의 무역 마찰과 같은 보호무역주의 추세는 한국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하고 있어요. 내수시장에서도 인구 감소와 개인 부채 증가로 인해 소비 여력이 감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S&P는 외국 투자가들의 시각으로, 즉 우리나라의 원화 환율과 우리나라 금융 시장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큰 규모를 가지고 있는 국제 자본의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한국 기업들을 평가하고 거기에 맞는 코멘트를 합니다. 이를 통해, 한국 시장참여자들도 S&P를 통해서 외국의 주요 투자가들은 이런 사고 체계를 가졌고,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를 알게 되는 효과도 있죠. 위험이 닥친 이후에 신용위험을 경고하는 것보다, 글로벌한 분석과 정확한 예측을 통해서 신용도 하락 혹은 상승을 미리 시장에 알려서, 시장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일도 S&P의 신용평가사로서의 주요 역할입니다.
4. S&P의 한국 시장에서의 향후 계획이나 전략이 있다면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 어떤 기회를 보고 계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S&P에서 한국 시장을 책임지고 있는 만큼, 한국 시장에서의 목표는 S&P가 한국에서의 지속적인 성장을 하는 것입니다. 160년의 역사를 가진 S&P는 전 세계에서 국제자본시장과 함께 발전해 왔습니다. 시장에서 새로운 자본조달 방식이 나와서 신용등급 수요가 발생하면 S&P는 새로운 방법론을 개발하여 적시에 새로운 자본조달방식에 맞는 신용평가를 제공하는 식이지요.
최근 몇 년간 국제자본시장에서 새로운 영역은Sustainable Finance (지속가능금융) 분야와 Private Market funding입니다. 보통 이렇게 새로운 방식의 자금조달방식이 나오면 군소 평가업체들이 저마다의 평가 방식으로 등급을 발표하여 초기에 시장이 다소 혼란스러워 하기도 합니다. S&P는 이러한 Sustainable Finance 및 Private Market 분야에서, 160년의 노하우와 세계 1위의 글로벌신용평가사라는 브랜드 파워를 바탕으로, 적기에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믿을만한 신용등급을 제공하여 시장의 혼란을 줄이고 시장이 초기에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노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런 노력을 고객들이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시면, S&P가 한국시장에서 지속적인 성장을 하고자 한다는 목표는 자연스럽게 달성되는 거고요.
또 한 가지는, 제가 한국 대표가 되기 전에 애널리스트였을때 홍콩이나 일본에서 일했던 것처럼, 현재 한국 기업 신용 평가를 담당하는 애널리스트들은 현재 모두 해외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국 시장이 S&P 글로벌 입장에서 충분히 큰 규모의 시장으로 성장하고 법 제도 등이 적절히 뒷받침된다면, 궁극적으로는 한국 담당 애널리스트들은 한국에서 근무할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싶습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 신용등급을 좀 더 가까이에서 분석하고 고객과 소통할 수 있게 돼서 S&P와 고객에게도 득이 될 것이고, 한국 시장에 양질을 일자리도 창출할 수 있게 되어 우리나라에도 우리 후배들에게도 도움 될 것 같아서 추진하고 싶은데, 어느 시점에 가능하게 될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5. 대표님께서 커리어를 쌓아오시면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이나 사람이 있으신가요?
가장 큰 영향을 준 사건은 IMF, 카드 사태,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의 일련의 금융 위기였습니다. 기존 국내 위주의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소위 글로벌한 시각을 갖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사고의 유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하게 깨닫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제 중요한 지적 재산이 됐죠. 가장 영향을 준 사람은 아버지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도 서울대 상대 58학번 동문이십니다. 아버지는 시시콜콜 하나하나 조언해 주시기보다 어렸을 때 크게 굵직한 몇가지만 강조해주셨는데, 자신만의 전문성을 쌓는 것과, 글로벌 환경에서는 영어 실력을 갖추는 것, 한자리에서 진득하게 버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막연한 조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돌아봤더니, 제가 애널리스트라는 전문가로서 20년 이상 근무했고, 계속 영어 쓰는 일을 하면서 외국에서도 14년이나 근무했고, 또 S&P라는 회사에 20년이나 꾸준히 다니고 있습니다. (웃음)
6. 권재민 동문의 학교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기억에 남는 활동이나 수업이 있으신가요?
다들 유명한 전설로 들었을 것 같은데, 기억에 남는 수업은 한희영 교수님의 마케팅 수업입니다. 그분의 시험 출제 문제는 몇십 년 동안 똑같아요. ‘마케팅이란 무엇인가’. 학생들 사이에서는 답안을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일종의 전통처럼 내려왔어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르겠는 우스갯소리가 있는데, 어느 날 이 수업 시험 날에 조교님이 들어오셔서 칠판에 쓴 첫 글자가 ‘마’가 아니라 ‘도’였던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아, 망했다’ 하면서 사방에서 준비해 온 답안 찢는 소리가 막 나고 그랬는데, ‘도대체 마케팅이란 무엇인가’라고 쓰셔서 성급히 미리 준비해 온 답안지 찢었던 사람들은 진짜 다 망했다. (웃음) 이런 농담이 유행이었습니다.
7. 마지막으로, 금융 업계에 진출하려는 경영대 후배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글쎄요. 저희 때보다 지금 후배들이 더 학과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것 같고 재무회계 기초 지식도 훨씬 많은 것 같아서 제 조언이 큰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몇 가지 기본적인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체력을 길러라’라는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긴 시간 동안 일하고, 야근과 출장이 이어지는 환경에서 필수적이고, 가장 쉽게 이야기되지만 제일 중요한 공기 같은 존재입니다. 20대 후배님들은 공감이 잘 안되실 수도 있겠지만 30대 중후반만 넘어서면 쉽게 공감하실 수 있을 겁니다. 두 번째는, 지적 호기심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금융업도 중개업이고, 고객의 니즈를 정확히 이해해서 거기에 적합한 우리 상품을 찾아서 적시에 제공해야 한단 말이에요. 우리 상품을 이해시키는 데도 다른 지식을 차용해서 설명해야 쉽게 다가갈 수 있으니까 지적 호기심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Critical thinking 능력입니다. 신문에서 뭐라 적혀있으면 ‘그런가보다’하는 게 아니라 자신만의 관점이 있어야 해요. 제가 애널리스트로 일하면서 어떤 사건이 발생하면 남들이 코멘트하기 전에 신문을 안 읽고도 내 생각에 자신 있는 때가 언제부터인가 왔는데, 그때 이제 좀 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틀릴 수도 있지만, 상대방의 챌린지에 논리적으로 맞받아칠 수 있도록 생각이 갖춰져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는, 커뮤니케이션 능력입니다. 홍콩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나라의 사람들을 매니징해봤는데, 한국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좀 더 분발해야 할 부분이 커뮤니케이션 중에서도 ‘리스닝’입니다. 질문에 대한 정확한 대답을 안 하고, 질문에서 묻는 것과 가까운 본인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답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요. 훈련이 안 돼서 그런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는 네트워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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