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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소멸
기억의 소멸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특징 중 하나가 어떤 사건이나 사물을 기억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루에 일어난 모든 사건을 기억할 수가 없어서 그중 중요한 것들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런 기록들이 모여서 지식도 되고, 역사도 구성하게 된다. 사람이 타인과의 관계나 심지어 자신에 대한 기억이 없다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에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의 기억은 유한하다. 한 사람의 기억은 그 사람의 수명보다 훨씬 짧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한 사회의 기억도 생각보다 그리 길지 못하다. 한국사회를 살펴보면 정말 빠르게 변하는 것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들은 대개 30년을 넘기지 못한다. 자주 다니는 식당이나 카페 중 불과 10년을 넘긴 곳을 찾기 힘들다. 학창 시절 다니던 추억의 단골집이 남아있는 경우가 얼마나 되는가?
심지어 관혼상제에 따른 의식조차도 한 세대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필자는 부친을 대학 재학 중에 여의었다. 1980년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장례식장은 개념조차 없는 시절이라 초상을 집에서 치렀다. 조문객이 오셔서 문상을 하면 상주들은 일어나 곡(哭)을 해야 했다. 그러던 장례문화가 한 세대 만에 얼마나 바뀌었는가? 또 90년대까지만 해도 화장(火葬)을 꺼리는 사회적 분위기가 강했다. 대부분 매장(埋葬)을 했으며, 어쩌다 화장을 하는 집은 주위의 눈총을 의식해야 했다. 지금 어떠한가? 이제는 매장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변했다.
모든 것들이 정신없이 변하다 보니 이제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소중하게 여겨진다. 특히 가족관계에서는 정겹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무엇이라도 붙들고 싶은 심정이다. 대가족의 단란한 모습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당연하지만 결혼한 아들 집을 제대로 방문해 본 적이 없는 부모가 늘고 있으니 이대로 가족이 해체되고 말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 나만이라도 한 두 가지 변치 않는 모습을 유지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있다. 예컨대 크리스마스날 저녁은 꼭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한다든가, 광복절 연휴에는 함께 여행을 한다든가 하는 것들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자식들은 따라만 와 주면 다행이고, 우리 부부가 늘 그 자리에서, 언제나 아이들이 찾아와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 그런 것들이라도 하나의 가족 전통으로 만들어 가기로 결심하고 있다.
지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문자나 영상으로 알 수 있는 형식지(形式知)이고, 또 하나는 면대면(face to face)으로 밖에는 알 수 없는 암묵지(暗默知)다. 인터넷과 통신의 발달로 형식지는 얻기가 쉬워졌고 그에 따라 상대적 가치는 저하되고 있다. 반대로 암묵지의 상대적 가치는 상승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해 대면 만남이 어려워지는 작금의 현실에서는 이런 현상이 오히려 강화될 뿐이다. 그래서 암묵지를 저장하는 기억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대학도 오래도록 기억이 저장되는 곳이다.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 컨텐츠와 연구 방식이 변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겠지만 졸업생의 시각으로 보면 대학은 언제나 젊은 시절 뜨거운 열정을 부딪치던 곳으로 남아 있다. 각자 자신의 생활 속에 늘 대학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문득 뭔가 익숙한 것이 그리워질 때, 작은 성취를 인정받고 싶을 때, 내가 가는 길이 맞는 방향인지 막막해질 때, 그럴 때 늘 그 자리에 있는 학교가 얼마나 반갑겠는가?
조그만 메모리칩 하나에 한 사람의 일생을 저장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기억의 소멸을 염려하고 있다. 지식의 저장 공간이 커 갈수록 감성의 저장 공간은 허전해지기만 한다. 오래된 것 중에도 소중한 것이 있다는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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