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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석 PD의 드라마같은 인생을 엿보다
김원석 PD의 드라마같은 인생을 엿보다
경영학과에 진학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고등학교 시절 ‘리 아이아코카’의 자서전을 읽고, 전문 경영인의 존재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엔 우리나라에서도 ‘연봉 1달러 경영자’로 꽤 유명했던 분인데 요즘 친구들은 잘 모르더군요. 2019년 영화 <포드 V 페라리>에서 포드의 회장에게 지금 포드에게 필요한 것은 ‘승리의 이미지’라고 말하며 페라리 인수를 추진했던 마케팅 담당 임원이 바로 리 아이아코카입니다. 책의 내용은 포드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고, 퇴사 후 크라이슬러에 스카우트되어 파산 직전의 회사를 재건하는 이야기입니다. 마침 비슷한 시기에 TV에서 방송되었던 <적도전선>이라는 드라마를 보며 세계를 누비는 기업인의 활약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전문경영인이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게 되었고 경영학과 진학을 꿈꾸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전문경영인을 동경한 것이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의 ‘스토리텔링’을 좋아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학부 시절 기억에 남는 수업이 있으신가요?
사실, 그렇게 원해서 여러 번의 도전 끝에 들어온 경영학과인데, 들어오고 나서는 과연 나의 적성에 맞는 학문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숫자에 약한 편인데 경영학의 세부 전공들은 당연하게도 대부분 ‘수학적인 머리’가 중요했습니다. 믿었던 마케팅 전공마저도 가장 먼저 ‘경영 통계’를 가르치더군요. 아마도 정확한 시장조사를 위해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었겠지만 제게는 높은 진입장벽으로 느껴졌습니다.
마케팅만큼이나 기대했던 국제경영학 관련 수업을 수강했을 때의 일입니다. 글로벌 기업들의 경영철학, 문제 해결 과정, 위기관리능력 등을 담은 HBR(Harvard Business Review)을 읽고, 비슷한 사례의 국내 기업을 찾아 발표하는 수업이었습니다. HBR을 그때 처음 읽어봤는데 영화나 드라마에서 볼 법한 스토리텔링에 기반한 케이스 리뷰라는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고 재미있었습니다. 열심히 국내 한 기업의 사례를 찾아 발표했지만 발표점수가 클래스 최하였습니다. 경영학이 적성이 아닌가 싶어 고민 끝에 3학년 때부터는 중국어 부전공을 했습니다. 당시 중국과 수교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국내에서 중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울 기회가 학교 강의 외에는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미 저보다 중국어를 훨씬 잘하는 중문과 1학년 학생들을 따라가느라 힘들었지만, 북경대에서 어학연수도 받아 가며 나름 열심히 했습니다. 어학과 문학의 재미를 느꼈던 순간이었습니다.
경영학과에서 PD라는 진로를 꿈꾸시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경영학 전공이 제게 맞지 않는다고 느낄 즈음에는 자신감과 자존감이 많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직업적인 진로만큼은 제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고 싶은데 그것이 무엇일까? 과연 그런 것이 있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TV에서 <모래시계>라는 드라마가 방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전 재수할 때, 같은 작가와 감독이 만든 <여명의 눈동자>를 챙겨 보느라 공부에 방해가 되었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는 ‘연극’과 ‘록밴드’를 했습니다. 연극은 단순히 동아리 활동을 넘어 꽤 열심히 했었고 서울예대에서 주최하는 동랑청소년 연극제에 매년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기타를 잘 치고 싶어서 밤을 새우며 연습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직업으로 하기엔 연극과 음악 모두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포기했었지만, 만약 드라마를 하게 된다면 제가 했던 노력의 경험들이 큰 자양분이 되어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번만큼은 제가 제일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 드라마가 그 답으로 느껴졌습니다.
Mnet - KBS 드라마팀 – CJ ENM – 스튜디오 드래곤 – 바람픽처스 프로듀서까지, 각각의 여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듣고 싶습니다.
당시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지상파 방송국 공채에 응시해야 했습니다. 10명 정도의 소수 인원만 합격하기에, 언론고시라 불릴 만큼 경쟁이 치열했는데, 졸업 직전에 발생한 IMF사태의 여파로 방송국 입사의 문은 더욱 좁아져 있었습니다. 아예 공채를 하지 않는 방송국도 있었습니다. 저는 98년부터 1999년까지 2년 동안 5번의 실패를 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아리랑 TV의 FD로 일하기도 했는데, 혹시라도 방송국 PD가 적성에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 미리 경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MNET의 PD 공채에 합격을 해서 1년 6개월 동안 쇼PD 생활을 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지만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때 배운 촬영과 편집 기술은 이후 제가 지상파에 들어가 빠르게 인정받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국 드라마 PD의 꿈을 버리지 못해 MNET 근처의 고시원에서 숙식하면서 두 번의 지상파 시험을 더 봤고 결국 2001년 KBS 공채 27기로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KBS에선 <파트너>, <신데렐라 언니>, <성균관 스캔들> 등을 연출했습니다. 이후 MNET에서 저를 가르쳐 주셨던 선배님이 함께 드라마를 만들어보자고 권유하셔서 CJ ENM으로 직장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스튜디오드래곤은 CJ ENM에서 분사한 회사였기에 자연스럽게 넘어왔습니다. CJ와의 계약이 종료된 후 마음이 맞는 프로듀서와 바람픽쳐스라는 회사를 만들었는데 이 회사를 2020년 카카오M이 인수하면서 카카오에 둥지를 튼 셈이 되었습니다.
<성균관 스캔들>, <미생>, <시그널>, <나의 아저씨>, <아스달 연대기> 등 많은 히트작을 연출하셨습니다. 연출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서 얻으시나요?
연출 아이디어라는 것이 연출 아이템을 선정하는 기준을 말하는 것이라면 제 경우는 제가 보고 싶은 드라마, 제 주변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드라마가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제가 모르는 다수의 대중이 좋아할 것인가, 혹은 해외의 시청자들에게 소구력이 있을 것인가는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아이템의 내용은 제가 읽은 책, 혹은 지인과의 대화 등에서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도 있고, 작가님께서 먼저 제안해서 드라마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미생은 제 지인의 추천으로 원작을 읽고 드라마로 만들게 되었고, 시그널, 나의 아저씨는 작가님의 초고가 시작이었습니다.
<미생>, <시그널>과 같은 히트 작품들의 후속 작품을 생각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미생, 시그널 모두 후속작에 대한 시청자의 요구가 많았기 때문에 당연히 논의가 있었습니다. 당연히 기회가 된다면 도전해보고 싶습니다만, 한다면 잘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에게 실망을 주지 않을 수 있도록 신중하게 준비해서 결정하려고 합니다.
PD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제가 드라마 연출을 하면서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느낀 것은, 이른바 ‘감성지능’이라고 하는, 내 감정이 어떤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통해 상대방의 감정도 유추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이 없으면 대본을 표현하기는커녕 이해하기조차 어렵습니다. 같은 대본을 읽더라도 사람마다 대본을 이해하는 능력이 천지 차이라는 걸 알고 깜짝 놀란 적이 많습니다. 어린 학생들이 화가 나건, 슬프건, 답답하건 ‘짱난다(짜증난다)’ 한 마디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면 결국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버려서 대본에 있는 캐릭터의 감정을 이해 못 하게 됩니다. 단순히 드라마 연출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 감성지능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D로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연출해보고 싶은 장르가 있으신가요?
구체적인 장르는 따로 없지만, 저는 PD로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요새는 계층, 연령, 성별, 지역에 따라 일종의 벽 같은 것이 무수히 많이 생긴 것 같습니다. 서로 간 혐오나 증오의 감정도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드라마가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공감과 응원을 받기 어려운 시대에 함께 고민할 수 있는 화두를 던지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방송계 진로를 희망하는 후배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예전에는 드라마 PD 하면 연출자를 떠올렸으나 이제는 프로듀서와 디렉터가 구분되고 드라마제작과 영화 제작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프로듀서분들도 경영학과 출신들이 많이 계십니다. 한국의 문화 상품이 세계적인 관심과 지지를 받는 요즘, 프로듀싱의 영역이 중요해질수록 미디어 콘텐츠 분야는 경영학과 출신들에게 더욱 매력적인 분야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제 첫사랑인 경영학을 포기하고 방송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제가 하는 일이 모두 경영학에서 배운 것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드라마를 기획, 홍보하고(마케팅), 자금을 조달하고(재무), 제작 계획을 세우고(생산관리), 스태프를 꾸리고(조직관리), 제작비를 관리하고(회계), 국제적으로 협업하는(국제경영) 경영학의 세부 전공들이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에 녹아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바늘구멍 같은 방송국 공채를 통해서만 방송 일을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영화, CF, 웹툰, 웹소설, 유튜브 등 경로가 굉장히 다양해졌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뜻이 맞는 사람과 함께 조금씩 이뤄나가다 보면 분명 우리나라 미디어 콘텐츠 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저마다의 인생 모두가 한 편의 드라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삶의 드라마를 훌륭히 연출해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요?
저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실패를 많이 해보니, 실패는 하면 할수록 두렵고 자신감이 없어질 뿐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실패의 경험이 아니라 ‘작은 성공의 경험’이었습니다.
꿈이 클수록 ‘큰 거 한방’을 위해 무리하게 모험하지 말고, 본인이 이룰 수 있는 작은 목표를 세워 하나하나씩 이뤄가는 것을 추천합니다. 시간적으로도 이편이 훨씬 빠를 수 있습니다.
드라마를 훌륭히 연출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좋은 대본과 캐스팅인데 인생의 대본은 완성된 것이 아니니 캐스팅을 잘 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생을 바꾸려면 만나는 사람을 바꾸라는 말이 있듯, 내가 배울 수 있고, 서로 영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작은 목표부터 차근차근 이뤄 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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